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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15. <부정공>금헌공휘규남(휴경)행장(錦軒公諱圭楠(休警)行狀)
1. 문헌 목록 〉23. 23世 〉17. <부정공>효산규순(휴일)선생행장(曉山圭詢先(休一)生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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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범헌공휘규태(휴태)행장(凡軒公諱圭泰(休泰)行狀)
범헌공휘규태행장(凡軒公諱圭泰行狀) 公의 諱 休泰요. 字는 圭泰며 號 凡軒인데, 玉川趙氏로서 고려검교대장 문하시중 휘 璋을 上祖로 三傳하여 휘 元吉, 호는 농은이요, 벼슬은 문하시중인데 고양왕조에 정책훈으로 옥천부원군에 책봉됐고, 生 휘 瑜의 호는 건곡이요. 벼슬은 부정인데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절의를 지켜 두문동에 은둔하였는데, 조선조에서 한성부윤으로 책봉하여 나오기를 권하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수양산 달이 내가슴에 비치고 있다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生 절민공휘숭문(崇文)은 일찌기 무과에 급제하여 함길도 병마절도사 겸 경성도총부사였고 生諱 哲山 증동공교관공 단종사화 병자화에 사육신에 같이 부자가 동시에 순절한 十一代孫 諱 鎭龍 호 담헌의 증손 諱연승 초명 正煥. 호 겸암 妣 장흥임씨 사이에서 三남三녀중 장남으로 一九一五年 甲寅 二月 二十五日 대대로 세거해 왔던 순천군 주암면 구산리 四五八番地에서 출생한 公은 천성이 단정하고, 재필이 뛰어났다하였고 어려서부터 효도를 중시하고 우애하는 성품이였다고 했다. 十세에 광천보통학교에 입학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당시 형편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독서재를 앉히어 한문공부를 전수하다가 중학교 강의록 三年과정을 이수하고 주경야독하다가 뜻한 바 있어 면서기 시험에 합격하여 주암면 서기에 임명되어 공직에 첫발을 디뎠고 이후, 모범공무원으로 봉직하였다. 공의 효행은 주위사람의 표상이 되었으며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부친이 병을 얻어 신고하시는 동안 공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석으로 약초를 손수 채집하여 탕재를 마련하는등 간곡한 간병을 하였다. 三년을 하루같이 효성으로 간병하였으나, 백약이 무효로 부친이 향년 五十九세로 별세하였는데 공이 통곡하며 슬퍼하는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어 보는 사람들마다 눈시울을 적시었다한다. 公의 이러한 효성은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부친겸암공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영위에서 형님들과 함께 三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거하면서 눈이오나 비가오나 매일 새벽이면 산소에 가서 통곡하며 애도하였는데, 그 곡성이 마을사람들의 잠을 깨웠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 부자의 효성은 주위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공은 一九五三年 지방자치가 처음 실시되었을 때 공직에서 퇴직하여 초대 면의원에 진출하였으며 의회의 구성과 함께 초대 주암면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지방자치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一九五九년에는 면민들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 주암면장에 취임하여 면정쇄신과 함께 지역발전과 민심화합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 면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특히 후진들의 교육을 위해 주암고등학교 설립추진을 주장하고 설립기금조성사업을 시작하여 오늘의 주암종합고등학교 설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公은 공직에서 퇴직한 후에도 승주군 관내 十一개면 전직면장회의를 창설하여 회장직을 맡으며, 지역사회 화합과 후배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노후에는 향리노인회를 조직하여 노인회장으로서 노인정 건립에 앞장서는 등 지역의 큰 어른으로서의 몫을 끝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公의 妣 경주정씨 「一九一七年 丙辰 十二月 二十七日 生」 사이에 武勳 昌勳 東勲과 딸 정훈 사위 경주정수남 등 三男一女에 손자 용석 왕익 순익 문익으로 다복한 가정에서 향복을 누리다가 一九九六年 享年 八三세로 일기를 마치고 별세하여 구산촌전 가장동 백호언덕에 병좌로 안장되었다. 姪 忠勳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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